행복이라는 것은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 평안을 줄 수 있는 여러 요소들과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며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여 그 뜻에 순종해 가면서 얻는 영적인 만족감으로 인해서 우리는 큰 행복과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 믿음의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평안과 행복은 하나님의 뜻을 내가 수용할 수 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일들은 목표한 것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함으로 이루는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내가 받아들여 수용함으로써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가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앞두고 그 마음의 간절함으로 소원했던 것은, 할 수 있으면 그 잔을 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이 잔을 피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지만 결국 하나님의 뜻을 수용함으로써 그 바램을 접었습니다. 그렇듯 수용에는 내 뜻을 접어야 하는 결단이 요구됩니다. 희생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내 뜻에 반해도 받아주고 용납해 주어야 하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수용성은 능력입니다. 성경을 보면 결국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는 일은 그들의 삶에 있어서 절대가치였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기 전에는 세상 가치를 목표하고 살았습니다. 그랬던 그가 믿음의 조상으로 합당한 인격과 품성을 가질 수 있게 되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드리는 수용성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삶에 목표했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드리는 수용성으로 인해 가치 기준이 바뀐 것이고, 그것으로 다른 삶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수용성은 곧 믿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신뢰가 전제되지 않으면 수용성은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성경은 아브라함의 수용성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 그렇게 아브라함은 수용성을 통해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여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에 있어서 수용성은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입니다. 수용성은 신뢰함의 훈련이고 그것은 믿음입니다. 그러니 믿음의 성장을 위해 말씀을 받아드리는 수용성을 높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드릴 수 있는 능력인 수용성은 순종의 연습으로 높일 수 있습니다. 말씀을 받고 행하는 연습을 한발 한발씩 성실하게 감당하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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